참가후기

백민경(Xavier High School 2010년 졸업, Indiana University, Bloomington 입학)

작성자 KEF
작성일 18-01-16 14:18 | 조회 15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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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 인생의 한 chapter  

유학을 처음 결심한 중학교 3학년, 아빠의 반대로 원하는 때에 가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유학의 꿈은 품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나의 유학이 결정되고 나서 일은 일사천리로 처리 되었다. 남들보다는 조금 늦게 학교가 결정되는 바람에 급하게 출국을 하게 되어서 그런지 긴장감은 덜 했던 것 같다. 친구들과 제대로 작별인사도 못한 채 공항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지금 유학하는 친구들 이야기 들어보면 처음 비행기에 올라타는 순간부터 긴장하고 겁부터 먹었다던데 나는 좀 달랐다. 공항에서 부모님과 헤어지며 우는 학생들이 허다했지만 난 뭔지 모르게 흥분되는 기분부터 앞섰다. 비행기를 장시간 타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막상 몇 시간을 집이 아닌 곳에서 일년 동안 산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친구는 사귈 수 있을지, 음식이 입에 맞을지, 말은 잘 할 수 있을지, 같이 사는 가족들에게 눈치는 보이지 않을지. 

처음 호스트 집에 도착한 나는 실망이 컸다. TV에서만 보던 미국 가정집이 아닌 외딴 시골에 농장을 하고 있는 집이었다. 지금은 그 실망이 오히려 감사의 마음으로 변했다. 교환학생을 아주 시골로 가게 된 나는 한국 학생들은 물론 외국에서 온 교환학생이 달랑 두 명인 학교로 배정을 받았다. 나와 함께 살게 된 또 다른 교환학생은 독일에서 온 Sophie.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우리 사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나라에서 우리만의 힘으로 살게 된 서로에게 의지도 많이 했던 것 같다. 교환학생으로 Tennessee에서 지낸 1년 동안 나는 너무나 달라져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예전에는 눈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던 자립심이 너무나 자라있었고 한국 학생이 한 명도 없었던 탓인지 영어도 서슴없이 잘 하게 되었다. 

솔직히 학기 초에 패닉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처음 내가 듣고 싶은 수업을 결정하고 수업을 이해하고 방과 후까지 남아서 들었던 설명을 또 듣고 또 듣고 했다. 처음에는 선생님들이 귀찮아 하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결과는 정 반대였다. 복도에서 마주칠 때 마다 활짝 웃어주시고 질문 할 때마다 친절하게 대답해주시며 점수도 후하게 주시는 선생님들을 보며 역시 진심은 통하는구나 생각했다. 감사하고 또 더 열심히 해야겠단 마음에 매일 집에 가서 복습을 했다. 복습을 하다 보니 시험 때 공부해야 할 양이 반으로 줄었고 다른 아이들 밤늦게까지 공부할 때 난 어려운 부분만 집중적으로 공부하고도 성적이 잘 나왔다. 그러다 보니 자신감이 생겨서 발표도 하게 되고 조금씩 참여도가 올라갔다. 미국은 숙제는 많지만 숙제가 공부와 같은 성향이 있다. 숙제를 하게 되면 저절로 예습이나 복습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공부도 같이 하게 된다. 초기에는 선생님이 하시는 말 하나하나 모두 필기했지만 조금 지나고 나서는 요점을 알아듣고 받아 적는 요령이 생겨 공부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우리나라처럼 학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서 수업시간에 자거나 딴짓을 하면 치명적일 수 있다. 태도가 흐트러진 것이 선생님 눈에 띄게 되면 아무래도 예쁨 받기는 힘들 것이다. 처음부터 수업시간에 발표하고, 나서서 참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한 일이지만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예습 복습을 하며 자신감을 키워가면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이다. 처음에는 복습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고 글자 하나하나가 아닌 요점을 찾아낼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예습도 큰 도움이 된다. 수업내용을 미리 알고 가고 다른 아이들이 모르는 것을 나는 안다는 생각에 복습보다는 예습이 수업 중에 자신감을 얻는 데에 도움이 되지만 복습이 학교 성적에는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선생님 이메일 주소를 꼭 받아놓고 숙제는 정말 정성 들여서 꼬박꼬박하고 여쭈어봐서 언제 시간이 되신지 알아봐서 보충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반복해서 설명 받으면 이해가 안되던 것도 되기 마련이다. 

친구문제도 걱정이 참 많이 됐었다. 수업을 말 한마디 없이 집중해서 듣고 수다 떨 친구하나 없이 지내는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다. 카페테리아에서 누군지 모르는 아이들 옆에 앉아 뻔뻔하게 밥을 먹으며 내가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용기를 내어 같은 수업을 받는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고 그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말씀한 내용을 놓쳤을 때 물어보기 창피하다고 가만히 있는 것 보다 뒤나 옆에 앉은 아이에게 도움을 청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친구를 만들었다. 점심시간은 나에게 정말 꿀 같은 시간이었다. 우리말이 아닌 영어로 하는 수업에 집중하느라 머리가 지끈거리고 짜증이 나기 일수였는데 점심시간에는 정말 마음 푹 놓고 아이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금요일 마다하는 풋볼게임을 친구들과 같이 가고, 영화를 보러 가고, 밥도 같이 먹으러 가는 단계까지 발전하였다. 두 번째 학기가 끝날 때 즈음에는 학기 내내 밥을 같이 먹으며 가장 친해진 친구도 생겼다. 미국에 있을 때는 일주일에 한번씩 전화도 하고 문자도 거의 매일 한다. 이번에 대학교에서 freshman인데도 불구하고 출전선수로 풋볼을 하게 되었다며 꼭 한번 오라고, 내 자리는 맨 앞자리로 비워놓겠다며 호들갑을 떠는 그 아이를 보며 미국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차갑거나 이기주의적이지만은 않구나 라고 생각했다. 

선생님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정말 뜻 깊고 재미있는 1년을 보낸 나는 한국의 교육방식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정말 즐거운 1년을 보내고 나서는 이젠 미국 어디를 가도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국 고등학교를 다니려면 다시 배울 것도 너무 많았고 게다가 1년을 다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인생 최고의 결정을 했다. 미국에서 계속 공부하기로. 

Wisconsin에 있는 카톨릭 사립학교인 Xavier High School에 11학년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걱정은 없었다. 살게 된 호스트 가족은 아름다운 집을 가진 평범한 가족이었다. 그들과 함께 지낸 1년 동안 나는 가족의 일원이 되기 위해 정말 노력했다. 그리고 그들도 나를 가족의 일원으로 대해주어서 무난한 한 해였다. 처음 학교가 개학 하고 나서 나는 친구를 만드는 데에 집중 했다. 지금도 하루라도 대화하지 않으면 죽고 못사는 Leah가 나의 첫 번째 친구가 되었다. Leah를 비롯한 그 아이의 친구들은 거의 모두 치어리더였다. 친구들의 부추김에 못 이겨 학교 개학 열흘 만에 치어리더 tryout을 하게 된 나는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떨렸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의 학창시절 발표도 반에서 제일 많이 하고 말도 많던 나는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코치와 캡틴은 너는 tryout이 여름방학 동안에 있었던 걸 몰랐으므로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 후로 나는 매주 금요일마다 방과 후 팀 아이들과 저녁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풋볼 게임장을 다니는 치어리더가 되었다. 풋볼 게임뿐만 아니라 미국식 축제인 peprally에서도 팀과 함께 짠 안무를 전교생 앞에서 하고 언제나 미소를 지으며 다니는 나를 보며 한국에서의 나와는 참 달라졌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치어리더를 한 것은 내 인생에 정말 잘 한 일 중에 하나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다. 한국에 돌아와서 친구들이 치어리더를 하냐며 동경 반 비웃음 반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속으로 한국 문화가 정말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치어리더 하면 농구장이나 야구장에서 짧은 옷을 입고 남들 눈길을 끄는 존재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미국 영화에서도 치어리더들은 멍청하고 겉멋만 든 존재로 표현된다. 그래서 처음 치어리더를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도 반대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아는 치어리딩은 스포츠의 하나로 하나의 커뮤니티이고 팀이다. 풋볼게임이 시작하는 늦여름 초가을에는 덥지만 내색하지 않고 관중들의 열기를 끌어내기 위해 두 시간 가까이 앉지도 못하고 응원을 하지 않을 때에는 열중 쉬어 자세로 움직이지도 않고 경기를 지켜본다. 풋볼 시즌이 끝나가는 늦가을 초겨울에는 추운데도 불구하고 유니폼을 입고 미소를 지으며 응원을 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 학교 팀이 이기면 우리 때문에 이긴 것 같고 지면 같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러면서 풋볼 선수 아이들과 친분도 쌓아가고 매년 축제 때에는 12학년 졸업반 남자 선수들과 짝을 지어 춤을 춘다. 그들과 관중들에게는 재미있고 추억거리일지 모르지만 우리 치어리더들에게는 마치 운동선수가 경기를 나가듯 중요한 하나의 행사였다. 치어리더를 하면서 팀워크라는 것을 배웠고 남을 위하는 마음도 더 해졌다. 스턴팅을 할 때에는 내 손에 올라간 친구의 안전이 나의 안전인 듯이 신중했고 같이 안무를 할 때는 동작 하나하나를 맞추었다. 코치에게 혼날 때에는 누구 하나 탓하지 않고 같이 벌을 받았으며 팀원 중 하나에게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내 일까지 제쳐가며 위로해 주었다. 그렇게 같이 웃고 같이 운지가 2년이고 그 아이들은 나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팀워크가 참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고 어떤 한 단체에 속해있다는 것 자체가 든든한 힘이 되었다. 그 팀에 속함으로써 무슨 일이 생기면 나에게는 이 친구들이 있다라는 생각으로 타지 생활을 조금씩 쉬워졌다. 봄 스포츠로 소프트볼을 했고 소프트볼 팀에서도 정말 소중한 친구들이 생겼다. 미국 학교 생활은 수업위주인 우리나라와 달리 많은 클럽과 스포츠 팀도 수업만큼 중요하다. 미국 생활을 처음 해보는 친구들이라면 아무 클럽이나 스포츠 말고 내가 정말 흥미 있고 나중에 대학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신중하게 선택했으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 같은 경우에는 FBLA의 부회장이었고 대학교 원서를 쓸 때 큰 장점이 되었다. 

무슨 클럽을 들 지 고민하는 나에게 학교 카운셀러는 이렇게 조언해주었다. 클럽을 많이 들 생각을 하지 말고 내가 정말 열정을 가지고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부문으로 두 세가지가 좋을 거라고. 처음엔 동의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전적으로 그 말에 동의한다. 클럽을 많이 든다고 좋을 것이 아니라 그 클럽에서 내 장기를 얼마나 활용했고 업적을 남겼느냐가 대학을 갈 때나 추천서를 받거나 할 때 더 크게 작용한다. 그러니 섣부르게 ‘개수만 많으면 된다’라는 생각은 버리고 어떤 클럽이 내 미래에 도움이 될지 또 어떤 클럽에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특별활동도 물론 중요하지만 학교생활은 더욱 더 중요하다. 어떤 운동을 하든 클럽활동을 하든 학교 생활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코치나 선생님께 말씀 드려 학교 숙제나 프로젝트 또는 큰 시험이 있어서 오늘은 좀 빠져야 할 것 같다라는 양해도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해야 한다. 혼나거나 남들보다 훈련을 더 많이 하게 되도 학교 공부가 우선이라는 것을 언제나 잊으면 안 된다. 미국은 학생 위주로 수업을 하기 때문에 선생님들과의 커뮤니케이션도 중요하다. 잘 이해하지 못했거나 그 전날 결석을 했다면 그 것은 전적으로 학생의 책임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일일이 챙겨주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미국 아이들은 자신이나 자기의 공부에 대한 책임감이 크다. 친구들에게 물어 가며 같이 공부하는 것도 방법이다. 상대방이 모르는 것을 알려주고 내가 모르는 건 물어봐 가며 공부하면 그 효과는 두 배가 된다. 나는 그러면서 친구들과 더 친해졌고 선생님들과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다. 

12학년 학기 말 즈음에 나의 친구들과 나는 바다도 놀러 가고 별장에도 놀러 가서 수영도 하고 낚시도 하면서 정말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졸업식 후에는 워터파크도 가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다. 대학 원서를 쓰고 고민을 할 때에는 정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는데 끝나고 나니 날아갈 듯 가벼웠다. 이제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유학은 절대 명문 대학교의 지름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명문 대학교가 가고 싶어 유학을 가는 거라면 말리고 싶다. 단지 그 목표로 가는 것이라면 유학생활을 하며 놓치는 것이 너무 많다. 설사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해외 명문대학교를 간다고 해도 그 문화를 알지 못하고 포용력이 없으면 사회에 나가서도 실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고 싶은 대학을 결정 할 때에 무조건 순위가 높은 대학으로 결정 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또 어떤 학교가 그 관련해서 좋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지를 봐야 할 것이다. 시야를 넓게 또 길게 가지는 것이 좋다. 미국에서 대학을 가게 되면 우리나라와는 달리 전공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너무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이거야 라고 생각을 굳히게 되면 자기의 참 재능을 못 찾는 경우도 있다. 

며칠 전 이제 유학을 처음 가게 되는 동생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충 이런 이야기였다 자기 친구도 유학을 가고 싶어하는데 그 친구는 머리가 좋아서 잘될 거라는 소리를 했다. 나는 0.5초의 고민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유학생활은 머리가 좋다고 잘하는 게 아니야. 얼마나 적응을 잘 하느냐가 머리가 좋은 것보다 훨씬 중요하지.” 말하고나니 생각도 해보지 않은 얘기였다. 그냥 경험에서 우러나온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게 정답인 것 같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유학을 간 것은 내 인생의 최고의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여러 문화를 경험한 덕에 사회생활에서도 나에게 플러스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여기저기 옮겨 생활하다 보니 적응력도 향상했고 이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대학교에 입학 할 날이 한 달도 안 남았으면서 걱정은 하나도 되지 않는다. 되려 흥분되고 벌써 신난다. 유학을 감으로써 나는 새로운 내가 되었고 한국에 있었으면 몰랐었을 잠재된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물론 힘들었던 시간도 있었지만 그 시간을 이겨냄으로써 나는 독립적이고 책임감 있는 나로 다시 태어났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명언이 있다. 힘들 때마다, 다른 사람 또는 문화 또는 내 자신과 갈등이 있을 때마다 이 말을 되새김질했다. 서로 죽을 만큼 지쳐가는 싸움이란 내 정신과 육체의 잣대가 된다. 비록 그 것이 내 자신과의 싸움이라도. 결국엔 나를 더 강하게 만드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힘차게 유학생활을 했으면 좋겠다. 내가 몸소 했던 경험이라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이란 도움은 다 주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이 기회를 감사히 여기며 얼굴에 두꺼운 철판을 깔고, 한국에서의 나를 버리고 다시 태어나는 마음으로 새로운 문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