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가후기

김택수(Whitinsville Christian School 2009년 졸업, Calvin College(with full t…

작성자 KEF
작성일 18-01-16 14:17 | 조회 155,903

본문

 

066a475b315df88cdec8d667b737abb8_1516079870_018.JPG

 

매 순간을 진심으로 즐기자! 
한국에서 공부를 해본 모든 학생들이 공감하듯이, 한국에서의 학교생활은 고통 그 자체였다. 아무런 꿈을 제시해 주지 않으며, 그저 “좋은 대학”을 가라고 알려주는 한국의 교육제도에 대해 무한한 회의를 느꼈다. 어떤 공부를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이 될 것이다 라는 희망과 꿈보다는 좋은 대학을 가면 인생이 핀다는 밑도 끝도 없는 희망 아래 공부해야 했던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이런 숨막히는, 희망이 없는 한국의 교육사회에서 난 미국유학이라는 한 가닥의 빛을 보았다. 

또 한가지 이유, 사회복지학 이라는 학과는 한국에서 아직 많이 발달하지 못한 학과이다. 이 사회의 저소득층과 사회 약자를 위해 정말로 필요한 field 임에도 한국에서의 사회복지학은 돈을 벌 기회가 적은 비선호 과목이다. 하지만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사회복지학이 사회변화에 큰 몫을 하고 있다. 나는 미국을 통해 나의 꿈인 사회복지가를 이루고 싶었다. 아무런 꿈을 제시해주지 않으며 좋은 대학만 가라고 압박하던 한국의 교육에서 나의 꿈이 이루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더 넓은 세상에서 더 큰 관점으로 세상을 눈으로 보고 더 많은 사람들을 피부로 직접 느끼고 싶었다. 그것이 나를 미국으로 이끈 힘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나셀오픈도어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 첫발을 디디게 된 곳은 Staples라는 Minnesota 주의 시골 마을이었다. 솔직히 한국에 살던 나에게 미국은 LA나 New York 등 대도시로만 이루어져 있는 줄 알았고, 또 그런 곳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작은 비행기를 타고 Staples에 내린 나는 너무나도 다른 미국의 모습에 벙어리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만 살던 나에게 이런 시골 생활은 꿈에서도 하지 못했다. 나는 이런 시골 사람들과는 훨씬 높은 계층의 도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고, 그러한 나의 오만한 생각은 나로서 마음의 문을 닫게 해버렸다. 학교에서도 나는 그들이 나에게 먼저 와서 관심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 절대로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저들과 다르다 라고 생각했던 나의 그 거만함은, 정말 학교 내에 한국친구 셋 이외엔 친구 하나 없는 외로운 학생이 되게 하였고, 쟤들보다 공부만큼은 잘할 수 있다 라는 생각으로 이끌었다. 아무런 교외 활동을 하지 않고 공부만 미칠 듯이 한 나는 전과목 A라는 점수를 간단하게 받았지만, 전화라도 한번 해줄 번번한 미국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하고 온 것이었다. 6개월 간의 교환학생 기간을 그렇게 보내고 집에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나는 너무나도 많은 후회를 하게 되었다. 미국에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 한국을 떠난 것이었는데, 결국엔 한국에서 처럼 나 자신을 속박한 채 책에만 머리를 묻고 있다가 돌아온 것이다. 나는 나의 오만했던 모습을 되돌아 보며 많은 회개를 했다. 하지만 그 교환학생 기간을 통해 나의 거만했던 모습을 깨버릴 수 있었고, 나의 모습을 되돌아 보면서 이젠 더욱 겸손해질 수 있었다. 유학생활은 다를 것이라고 확신하는 나였다. 

본격적인 유학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나는 Whitinsville, Massachusetts로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서 다니게 된 학교의 이름 Whitinsville Christian High School로 한 학년에 50명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작은 크리스찬 사립 학교였다. 나는 교환학생 때의 교훈을 기억하며 이번에는 나 자신의 마음을 먼저 열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누구든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하려고 했고, 처음 보는 학생이라면 무조건 인사를 하고 나 자신의 소개를 했다. 학교 아이들도 처음 며칠은 새로 온 아시안계 아이가 부정확한 영어를 사용하며 거침없이 말을 걸어오는 것을 보고 살짝 놀라더니 그 후론 계속 만나기만 하면 오히려 인사를 먼저 해주었다. 

학교가 시작하며, 축구시즌이 시작되고, 그저 축구를 제대로 된 잔디구장에서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혹해 축구팀에 들어갔다. 정말 쉽게 쉽게 생각하며 들어간 축구팀에서의 첫 번째 주일은 나의 안이한 생각과 너무나 달리 완전 지옥과도 같았다. 일주일 동안 매일 방과 후에 시작되던 기초체력 훈련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어질어질 하다. 매일매일 운동장을 몇 바퀴씩 뛸 때는 죽을 듯 했지만, 내가 뒤쳐질 때마다 나를 북돋아 주며 힘든 몸을 이끌고 한 바퀴를 더 뛰어주던 팀원들을 보며 그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다. 시즌 내내 이어지던 훈련과 다른 팀과의 게임들을 통해 나는 팀원과 하나가 되었고, 서로를 격려하고 부축하며 우정을 쌓았다. 나는 11학년 12학년 주전 공격수로 팀 내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12학년 때는 팀 내 최다 득점선수로 선정되는 영예도 얻었다. 11학년, 12학년 축구를 통해 팀 멤버와 든든한 우정을 맺었고, 그들은 시즌이 끝난 뒤에도 학교생활 내내 나의 절친한 친구로서 힘이 되어 주었다. 

겨울에는 농구시즌이 있었는데, 주전선수로 축구경기를 뛰고 자신감에 넘친 나는 농구를 할까 하다가, 평균신장이 6. 3ft (190cm) 인 농구부 아이들을 보고 바로 포기했다. 그렇게 겨울엔 방과후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Peter라는 친구가 나보고 Pit에 참여하라는 것이었다. The Pit은 우리 학교의 농구 응원단이었는데, 물론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고, 친구들끼리 모여 만든 그룹이었다. 원채 큰 목청을 가진 터라 Pit 내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고, 12학년이 되어서는 내가 Pit의 리더 중 하나가 되어서 아이들을 모아 Away 게임 때는 다른 학교로 응원 원정도 가고, 한국 스타일의 새로운 응원가도 만들곤 했다. 백인 밖에 없는 학교에서 아시안계인 내가 눈에 많이 띄었는지, 아니면 혼자 신나서 날뛰는 나를 인상 깊게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학교 학생들도 나를 알아보며 인사를 하기도 했다. 

11학년 때는 잘 몰라서 참여하지 못하고 있던 Choir도 12학년 학기가 시작하자 마자 등록했다. Choir Director 선생님께서 새로 오신 분이라 많은 것을 새로 도전하셨는데, 그것 중에 하나가 Ensemble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중창단과도 같은 것이었는데, 평소에 음악에 관심이 있었고, 방과 후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서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오디션을 거쳐 뽑힌 우리 20명은 (파트 별로 5명씩)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연습을 하기로 했다. 1년 동안 우리는 10곡 정도를 연습해서 Christmas Concert와 Fine Arts night 등 여러 번 공연기회를 가졌고, 나도 선생님 눈에 들어 솔로 파트를 맡기도 했다. 이 Ensemble에서 많은 노래와 찬양을 부르던 나는 문득 내가 미국에서 배울 것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이들에게 알려주자는 생각을 마음 한편에 가지게 되었다. 나는 그때 마침 Chapel Committee로서 봉사하고 있었는데, 마침 선생님께서 나에게 International Chapel을 하자고 제안하셨다. 나는 Ensemble 멤버로서 Chapel 에 나가 솔로로 우리나라 노래를 부르고, 듀엣으로 우리말과 영어로 찬양을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한국어 찬양은 모든 학생들로부터 굉장한 호응을 받았다. 그것에 힘입어 이후에는 Washington D.C.로 떠난 Choir Tour에서 한국 찬양을 솔로로 Lincoln Memorial과 Jefferson Memorial 에서 불렀고, 연말 학교 콘서트에서도 우리말로 찬양을 불렀다. 찬양을 듣는 사람마다 부드러운 곡조와 아름다운 한국의 언어를 기쁘게 받아들였고, 불러주는 나에게도 뜻 깊은 시간이었다. 

여러 가지 봉사활동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아쉽게도 나는 다른 활동으로 인해 두 가지 밖에 참여를 못했다. Mentoring과 Retirement Home 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Mentoring에 대해 얘기하자면, 우리학교 주위에는 공립 Northbridge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그 초등학교에서 ‘관심이 필요한 어린아이들’과 일주일에 한 번 8교시 자습시간을 할애해서 함께 해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딱히 무엇을 가르치거나 중대한 일을 해야 되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그 아이들과 퍼즐을 하거나, 놀이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매주 아이들과 놀아 주는 것이 다였던 나는, 내가 하는 이런 일들이 이 아이들을 변화시키는데 무슨 큰일을 해줄 수 있을까 하고 회의가 들기도 했다. 하지만 매주 아이들을 방문할 때 마다 그들의 굳었던 표정이 우리의 얼굴만 보면 해맑게 변하고 한번만 빠져도 저번 주엔 왜 안 왔냐며 툴툴거리는 것을 보며, 우리의 방문 그 자체가 이 아이들 마음 속의 응어리를 조금씩 풀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립학교였던 교환학생 때와 달리, 사립학교인 Whitinsville Christian High School은 상당한 노력을 들여야지만 괜찮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학교였다. 그렇지 않아도 European History, AP Calculus 등 어려운 과목들이 많이 있었는데, 축구에 Ensemble에 봉사활동에 Drama까지 병행해야 되는 바람에 하루하루가 정말 힘들고 고생스럽게 생각되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방과후 활동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이미 6시였고, 호스트 가족과 저녁을 먹은 후에 테이블 정리를 돕고 방에 올라와 책상 앞에 앉으면 이미 시계 바늘은 8시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배낭에 가득한 책을 하나씩 빼내며 그날 그날의 숙제를 하고 다가오는 report를 준비를 하다 보면 어느새 12시를 훌쩍 지나가 있었다. 그날 그날의 수업 태도도 전반적인 성적에 굉장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너무 늦게까지 밤을 샐 수 없어 다 끝내지 못하고 잠든 날도 있었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짬짬이 나는 시간을 분배하고 계획해서 쓰는 것을 터득했고, 그 짬에 최대한의 집중력을 쏟아 과제를 해나가는 법도 터득했다. 그렇게 열심히 효율적으로 공부를 해나가며 나는 4.0까진 아니지만 3.6 이나 3.7 정도의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나의 Senior 생활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또 한가지는 대학 Application 작성이었다. 내 주위에 유학생활을 하던 많은 친구들은 대학 지원을 앞두고 모두 하나같이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전략을 짰다. 좋은 대학이라 함은 한국에서 알아주는 대학, 예를 들면 Ivy league 대학이나 State university를 말하는 것이다. 정말 가려는 대학이 왜 좋은지, 자신이 정말 공부하고 싶은 과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그저 이름만 보고 신청하는 수많은 아이들을 보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 대학들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안되면 본전이다 하는 식으로 여기저기 Application만 넣어 두고 복권 당첨 되듯 아무런 희망 없이 기다리던 아이들이 다수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Grand Rapids, Michigan에 있는 Calvin College를 가게 되었다. 다수의 한국인들에겐 이름부터 생소한 대학교이지만, 나는 이 대학교가 너무나 나한테 잘 맞는 완벽한 학교라고 생각한다. 우선 내가 공부하고자 하는 전공수강이 가능했다. 내가 합격한 Penn State University는 큰 주립대학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지학과 수강이 불가능 했다. 둘째로, 외국인에게 장학금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 다수의 State University와 달리 사립대학교였으므로 외국인에게 다양한 장학금을 지급했다. 올 1월 초, 캘빈대에서 영예로운 학장 장학금을 주겠다는 합격통지서를 받고 껑충 뛰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특히 올해 초에 외환위기로 우리나라가 엄청 어려웠던 때라 4년 학장 장학금 소식을 받으신 부모님도 상당히 기뻐하셨다. 셋째로, 학생 인원이 적은 학교여서, 교수 한 명 대 몇 백 명의 학생들이 수업을 듣는 유명하고 큰 학교와 달리 교수님의 관심을 깊이 받을 수 있고, 학생과 교수간 communication이 훨씬 수월하다. 마지막으로 한국학생이 적다. 대부분의 Ivy리그 대학교나, 주립대학교는 대부분 한국인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나의 경험상으로는 외국에 있는 한국인들은 뭉치기를 좋아하고, 한국에서 처럼 생활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나는 미국에서 미국인들과 주로 교제했기 때문에 영어실력이 향상할 수 있었지만 다수의 유학생들이 한국인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바람에 오히려 한국어 실력이 늘어오는 상황도 발생한다고 한다. 특히나 한국인이 많은 UC계열의 학교들은 벌써부터 한국에서 유학생들을 모아 MT를 간다고도 한다. 이 네 가지의 이유는 지극히 나의 의견들이다.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대학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어느 대학을 지원하든지 자신의 인생을 길게 보고 대학을 선택했으면 한다. 좋은 대학, 소위 Ivy나 주립 대학을 가고 싶은 사람이 태반인 것을 알지만, 그렇게 좋은 대학에 겨우겨우 입학하여 자신이 원하지도 않던 과에서 하위권으로 대학을 졸업하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다. 대학 들어감이 곧 진짜 공부의 시작임을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입학보다는 졸업이 중요함을 기억해야 한다. 

나의 유학생활을 되짚어 보면 정말 다른 사람들보다 잘 한 것은 딱 한가지가 있다. 그것은 공부도 아니었고, 영어회화 실력도 아니었고, 특별한 대외활동 또한 아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던 것은 매 순간을 다른 이들보다 몇 배는 진심으로 즐겼다는 것이다. 누구는 이런 대학을 가기 위해 이런 봉사를 했고, 이런 운동을 했고, 이런 클럽 활동을 했다고 들었는데 나는 내가 정말 하고 싶었지만 공부가 절대적인 주가 되는 한국에서는 도저히 여건이 되지 않아 못했던 모든 일들을 내 맘과 몸을 다해 열심히 즐겼다는 것이다. 활동들 하나하나 그리고 공부한 내용들 모두가 나에게는 대학을 가기 위한 수단보다는 내 삶을 풍요롭게 할 목적이 되었다. 축구를 할 때에는 친구들과 뛰노는 것이 즐거웠고, 누군가의 도움이 된다는 것이 기뻐 봉사를 했으며, 찬양하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하기에 Choir를 한 것이며, 공부를 할 때는 내가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있는 기쁨에 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으로 쓰여질 때 즐거웠던 공부가 스트레스가 되고 진심이었던 봉사도 가식이 되지 않을까. 

나에게 미국 유학은 절대로 미국 명문대를 가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한국에서도 공부만 죽어라 하면 충분히 이룰 수 있는 꿈이니. 나에게 있어 미국 유학의 진짜 의의는 내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것을 최대한 경험하여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내가 그 세계를 위하여 정말 하고 싶은 공부를 즐겁게 하는 것에 있다고 굳게 믿는다. 미국에서 한국처럼 대학을 위한 삶을 살지 않았으면 한다. 이 강대국 미국에서 많은 얼굴을 가진 미국을 속속들이 발견하고 좋은 것들을 배우고 좋지 않은 것들은 교훈으로 삼았으면 한다.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할 것 같다고 걱정하지 말고 성공의 시기가 다를 뿐이지 여러분들이 성공할 것임을 의심하지 말기 바란다. 

이러한 유학의 기회를 내게 허락해주신 하나님과 부모님, 그리고 나셀오픈도어에 너무나도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유학생 여러분 그리고 부모님 모두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